Watching 정보전의 진수, 모스트 원티드 맨 2014/10/24 01:04 by 데미안

14.08.08

웃음 노란동글이 

 

 

 


 

 

 

장르 소설의 대가 존 르 까레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유작으로써 큰 화두가 되었다.

 

조연으로 나와서 일명 씬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하며 거대한 존재감을 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카포티에서 주연을 맡아 오스카까지 거머쥐며 바야흐로 역대급 배우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이 영화역시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원톱 영화로 볼 수 있으며 그의 대단한 연기를 티끌만큼의 아쉬움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수상자 없는 오스카가 그에게 가더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허나 이 영화가 단지 그의 유작이라는 타이틀 만으로 남기엔 아쉽다는 것이 문제다.

 

어떻게 본다면 훌륭한 마지막 영화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영화 자체의 작품성과 매력이 가리워지는 느낌도 지울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그의 유작임을 차치하고서라도 길이 회자될 좋은 영화였다.

 

 

 

'총성 없는 첩보물'

 

흔히 첩보물 하면 그려지게 될 클리셰들이 이 영화 속에선 보이지 않는다.

 

총 한발 제대로 나가지 않는 영화는 마치 수백발의 총성을 듣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는 순전히 서스펜스의 활용만으로 가능했으며 그 서스펜스를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로 인해 우리는 긴장감을 놓치 못하게 되어버린다.

 

'사건 없는 서스펜스'

 

거대한 사건이 빵하고 터지는 시점이 거의 없다.

 

보통의 서스펜스는 사건과 수습의 물결모양 곡선을 그리며 호흡을 이끌어가지만 터지지 않는 사건과 돌이켜 보면 엔딩전까지 순탄하게 진행되는 일련들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으며 느슨한 듯 긴박한 호흡으로 2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서스펜스에 빠져들고야 만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 안에서 바라보는 시선'

 

유럽 최대의 화교도 인구 비율을 가지고 있는 독일 함부르크.

 

911이후 강하게 조명되고 있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가?

 

우리의 시선과 그들에 대한 편견이 기인하고 있는 곳은 물론 강대국들의 가르침에 있겠다.

 

그런 무비판적 시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정의가 적용되지 않았을까?

 

열강의 시선을 부여받은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극렬하게도 보여준 영화였다.

 

 

 

 

 

BEST.

 

저음의 목소리에 연신 줄담배를 펴대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마치 존 르 까레의 소설 속에 있는 필립 말로우를 보는 느낌까지 들게 했다.

 

소설 속에서 표현되었던 주인공 군터의 모습을 완벽히도 재연해낸 연기를 보며 그를 추억하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이제는 인정받아야할 서스펜스의 대가, 안톤 코르빈

 

 

 

 

 

 

 

 

 

 

 

<tom waits - hoist that rag>


Watching 뉴욕의 파니핑크, 프란시스 하 2014/10/23 22:54 by 데미안

14.07.18

미소 노란동글이 

 

 


 

 

 

 

무거운 집착의 무게를 내려 놓았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리고 그런 무게를 언제라도 쓰러질지 모를 모습으로 떠 받치고 살아가는 우리들

 

어쩔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핑계를 무던히도 해대며 대도시를 살아가지만 그런 삶의 모습은 벅찰 수 밖에 없다.

 

 

 

"그게, 설명하기가 복잡해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유창함을 갖지 못한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들에게 이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소심함? 지나치게 많은 생각? 내향성?

 

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프란시스는 그 수식어를 정의하기 보단 삶 속에 녹아들어있는 모습으로써 나타낸다.

 

직업을 설명할 때나 자신의 친구를 설명할 때나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설명하며 구차해지는 모습들.

 

자존감의 높낮이를 떠나서 그 자존감의 형태적 특성이 다름을 이해받는 것 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날 3시간짜리 브런치 친구처럼 대하지 마."

 

그런 프란시스에게 유일한 베스트 프렌드인 소피는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는 인물이다.

 

소피의 존재로써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고 삶의 무의미함과 회의를 털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의지하는 관계는 자기 파괴를 가져올 뿐이었다.

 

한번에 와장창, 하고 파괴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서서히 자기 합리화를 거쳐 조용히 파괴되어 간다.

 

 

소피를 잃고 삶을 찾아가는 여정은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처받고 외롭고 계획대로 되는 것은 없고

 

하지만 프란시스는 울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은 결국 관계를 떼어 놓고 예기할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존재다.

 

프란시스의 장황하지만 솔직하고 낭만적이었던 관계 (또는 인생)에 대한 취중 연설 씬은 영화가 하고 싶어하는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순박하고 적절한 삶에 대한 요구는 의외로 이루기 힘들 만큼 커다란 것임을 우리도 각자 살아가며 느끼고 있을 것이다.

 

관계로 인해 때론 치유되고, 때론 상처받고, 때론 경박해지고, 또 구차해지는 모습은 설령 자신의 삶을 충분하다 느끼는 사람에게라도 주어지는 관계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위축과 치유를 반복하며 지쳐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사랑스런 편지와도 같았다.

 

 

 

 

 

 

BEST.

 

영화 '파니핑크'의 마리아 슈레더를 연상케 했던 그레타 거윅의 공감능력을 한껏 올려주는 연기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의 모든 씬에 등장한다>

 

 

 

의외로 잠시도 쉴 틈이 없는 빠른 호흡과 완벽했던 마무리

 

 

 

 

 

 

 

 

어마어마 했던 락앤롤 넘버들..

 

 

<t.rex - chrome sitar>




<rolling stones - rocks off>




<david bowie - modern love>




 

<paul mccartney - blue sway>



Watching 이성에 대한 본능의 통렬한 복수, 님포매니악 볼륨 2 2014/10/23 22:54 by 데미안

14.7.8

웃음 노란동글이 

 

 


 

 

 

"we are not and never will be alike"

 

 

자신을 죄인이라 지칭하던 조는 2편에 와서 점차 자신의 모습에 대한 혼란을 끼워넣기 시작한다.

 

그에 대한 셀리그먼의 조언과 위로, 해석들로 완성되어 가는 그녀의 모습.

 

섹스 중독자 들의 모임에서 대차게도 내뱉은 '난 지금의 내 모습을 사랑해' 연설 속에는 그녀의 역설적인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삶의 모습을 마주하기 위해 부단히도 적어논 연설문을 찢게되지만 생활 속에서의 자신은 그 연설문을 낭독 하며 성적 쾌락을 어둠에 두고 있는 위선을 부릴 뿐이었다.

 

 

 

"인간성이란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죠. 위선."

 

 

자잘한 감성에 빠지는 것을 위선이라 치부하며 극도로 싫어하지만 그녀의 삶은 위선으로 점철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욕망을 두르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 자체가 어쩔 수 없는 위선인 것이다.

 

욕망을 내보일 때 받게되는 질타의 시선은 질투의 시선과 다를바가 없다.

 

타인이 취하게 되는 욕망의 크기에 비례하게 될 시선의 크기가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예컨데, 이는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맥락을 갖는 하나의 본능적 방어기제일 수 있다.

 

기독교는 이를 원죄라 칭하고 보헤미안은 이를 삶의 방향성으로 만들었다.

 

셀리그먼은 이를 풍부하고 고풍스러운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의 흐름 속에 대입했고 조는 마지막에서야 깨달음을 얻는다.

 

 

 

 

"물푸레 나무가 아니잖아요."

 

"그래, 이건 떡갈나무야."

 

 

물푸레 나무의 전설은 반할만큼 아름다웠지만 세상은 동화와 달랐다.

 

땅 속에 박혀버린 떡갈나무라는 본성을 물푸레 나무로 치장할 순 있어도 바꿀 순 없는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는 자신의 나무를 찾을 꺼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만나게 되는 언덕 위의 나무 한 그루.

 

너무나 쓸쓸하고 아름다우며 천박하고 고귀한 그 모습에게서 찾게되는 자신의 본성.

 

자신의 본성을 세상과의 줄다리기 없이 마주하게 될 때 찾게 될 삶의 이유와 존재가치를 마지막에 와서야 너무나 잔인하고 슬프게 보여주고야 만다.

 

 

 

 

1편과 마찬가지로 시종일관 경박한 웃음을 선사하고 바로바로 그 웃음을 거둬들여 버리는 호흡을 같이한다.

 

그 고귀했던 이성과 그 솔직했던 감성의 만남으로 1편을 비난해 버리는 이 안하무인의 2편은 영화 역사에 길이남을 엔딩을 선사하고야 말았다.

 

어린 시절 조의 모습으로써 대비되던 이야기와 현실의 간극은 비로소 샬롯 갱스부르가 분한 조로 성장하며 드디어 그 간극을 무너뜨리고 숨막힐 듯한 호흡으로 상영시간을 지배하고야 만다.

 

이 영화는 조의 영화다.

 

조의 생명, 생각, 삶, 호흡에 따라 변화하는 영화 전체의 그것들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져감에 소름이 돋았다.

 

 

 

 

 

BEST.

 

공든탑을 걷어차 버리는 어떤 의미에선 충격적인 엔딩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얼굴로 험난한 연기를 펼치는 그녀는 역시 사랑스러운 배우였다.

 

 

 

 

 

 

 

 

 

 

 

 

 

 

<charlotte gainsbourg - hey joe>






Watching 흠잡을 곳 없는 동화의 실사화, 미녀와 야수 2014/10/23 22:53 by 데미안

14.6.22

미소 노란동글이 

 

 

 

 

 

 

 

의외로 화려하고 깔끔했던 CG와 2.45:1 비율의 와이드 스크린에 펼쳐진 장관은 숨이막힐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아름다움과 동화 속 판타지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미녀와 야수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기 보단 그 본연의 내용과 의미에 충실했던 이 영화는 자칫 밋밋할 수 있는 그 태생적 한계를 곳곳에 심어놓은 디테일들의 충돌로써 돌파할 수 있었다.

 

벨과 비스트의 연기는 훌륭했고 권선징악의 스토리라인도 진부함을 가까스로 모면하며 모든 배우에게 빛을 선사했다.

 

 

 

"나와 춤을 추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긴장 풀어요."

 

착하고 순수하지마 그 내면에 깊이있는 사랑을 담은 벨의 당돌한 모습은 점차 그 위치가 거대해지고 있는 프랑스의 신성(이제는 베테랑이라 불러야할까?) 레아 세이두의 연기위에 꽃을 피웠다.

 

어쩌면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미녀와 야수의 사랑에 대한 개연성은 영화의 스토리라인이 만들어 냈다기 보단 그녀의 연기가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혹여 당신이 나의 이 모습에 익숙해 진다면 날 사랑할 수 있겠소?"

 

야수의 울부짓음을 넘어선 사랑의 모습은 그 창의성이 아쉽긴했다.

 

영화 속 등장하는 모든 매력의 순간들이 무너지는 사태는 바로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 서사시로 가지 못하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보단 좀더 릴렉스하고 쉽게 진행함으로써 던져진 화두였다.

 

이는 영화의 퀄리티가 집중적으로 조명 될 운명적 가이드가 될 터인데 아쉽게도 부실하게 느껴질 그 순간이 관객의 보답을 받진 못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그 이야기를 보여주다.'

 

미녀와 야수의 정확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건드려진 내용상의 재배치는 없다.

 

허나 월트 디즈니에서 나왔던 미녀와 야수 에니메이션이 평론단의 호평을 받았던 것을 생각 한다면 이 영화를 박하게 대할 순 없을 것이다.

 

훨씬 더 허술했던 내용을 케릭터와 음악으로 커버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실사 영화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요구가 아닐까?

 

 

 

'그래도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전체관람과 등급을 받은 이 영화를 아이와 함께 보러가서 아이가 지루해하는 우를 범해선 안되겠다.

 

동화를 엮고 자극을 없애 만들었을 뿐이지 이 영화는 어른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퍼포먼스에 취해 있을 동안 슬며시 다가오는 순수함에 대한 추억과 동경을 불현듯 경험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BEST.

 

그녀는 언제나 옳다.

 

 

<lea seydoux>

 

<턱을 들고 아래로 내려보는 그녀의 눈 빛이 좋다>

 

 

아름다운 화면들

 

 

 

 

 

 

 

<pierre adenot - la belle et la bete>


Watching 희극과 비극사이의 색정, 님포매니악 볼륨1 2014/10/23 22:52 by 데미안

14.6.20

웃음 노란동글이

 

 


 

<이 멋진 포스터에 블러가 들어가는 것이 아쉽다>

 

 

 

'에로틱의 숭배, 사랑에 대한 저항.'

 

 

색정증은 삶의 잘 못된 부분들, 혹은 정신적 충격들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인간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본능에의 회기인가?

 

예로부터 '색'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둡게 가려진 것이었다.

 

훨씬 더 옛날로 돌아간다면 (인간이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순수한 존재일 때 까지) 예기가 달라지겠지만 사회적 인간이 완성되어가던 시점으로 그 시기를 잡는 다면 분명히 색은 그늘아래에 존재했다.

 

특히나 여성의 경우엔 더욱 강력한 어둠 속에 남아있었다.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선택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쉬쉬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사회적 풍토로 인해 어느 시기에나 그 원초적 본능에 대한 갈망이 있어왔다.

 

칼리큐라, 사드 백작, 고대 그리스 등등

 

섹스를 모른다는 것은 어쩌면 미각을 잃는 다는 것과 같은 뜻일 수 도 있겠다.

 

 

 

"날개가 있는데 좀 날면 어떤가?"

 

 

그렇다면 여성의 성은 왜 더 큰 음지에서 존재해야 했을까?

 

신비로움과 고풍스러움이라는 유럽식 포장을 달았을 때도 있었고 지조나 헌신이라는 동양식 포장을 달기도 하며 숨겨져 왔었다.

 

성적 욕구를 참는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여성을 사회적 분위기로 압박했던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앞서 말한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사회적 신분은 남성에게 열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남자들은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지키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정확히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소유욕을 위해) 여성의 성을 압박했던 것이다.

 

그렇게도 억압받았던 여성의 성은 오늘날에 와서야 숨통이 트인 정도로 변했으나 아직도 여러나라 (우리나라를 포함한)에서는 그 진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지 못한채 진보를 바라는 보되 적용시키지는 못하는 역설적인 정체현상을 겪는 경우인데 영화 속에서 조는 자신의 여성으로써 가진 유리함을 이용해 성을 푸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물론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풀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상황에 대한 죄책감이긴 했다.

 

그리고 샐리그먼은 말한다. "날개가 있는데 좀 날면 어떤가?"

 

 

 

너무나도 기본적인 욕구인 성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것인가?

 

우리는 아직도 섹스의 미덕을 잘못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섹스에 대한 공식을 일구다'

 

 

낚시와 섹스를 연관지으며 점차 진화해 바흐와의 콜라보레이션까지 발동하는 쾌락의 공식들.

 

바흐에 와서는 마치 한 가지의 쾌락만으론 아름다운 인생을 설계할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까지 했다.

 

이런 구성마져도 쾌락의 삶과 삶의 어둡고 슬픈 단면들의 챕터가 번갈아가며 그 어느 것도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사랑은 정선율일까?

 

조를 쾌락의 늪으로 인도했던 B의 이야기, "섹스의 완성은 사랑이야."는 바흐의 정선율로써 흘러가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 슬픈 목소리를 남기고 1장의 막을 내린다.

 

 

 

 

BEST.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다시한번 사회적 통념에 조롱섞인 미소를 날렸다.

 

이 노골적인 영화를 보는내내 낄낄대게 만든 그의 능력 자체가 문제작이다.

 

 

 

 

샬롯 갱스브로는 물론이거니와 우마 써먼, 샤이아 라보프, 크리스챤 슬레이터 등의 존재감

 

 


 

 

 

<충격적인 크리스챤 슬레이터의 따뜻한 아버지 연기...>

 

 

 

worst

 

대 여섯 번 정도 나오는 블러처리 된 화면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유일한 제한상영가 극장은 광주에 있다.

 

그러므로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영화에겐 사형선고.

 

이로인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블러 처리.

 

영화의 흐름이나 집중에 방해를 주는 정도는 아니다.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지만말이다.









<johann sebastian bach - the little organ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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